[기사]노조가 임금 결정권을 넘길 수 있었던 이유...‘존중’으로 상생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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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노무법인 21-02-03 11:22지난해 9월, 특이한 소식이 들려왔다. 한 제약회사 노동조합이 단체협약 임금결정권을 사측에 넘겼다는 이야기였다. 해당 노동조합 지회장은 "경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회사와 상생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아무리 상생을 위한 조치여도 임금 결정권을 넘기다니, 흔치 않은 사례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1월, 그 지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문준모 화섬식품노조 에스티팜지회장이다. 에스티팜은 원료의약품을 주로 생산하는 기업이다. 그는 에스티팜 생산라인 노동자들 모아 노동조합을 세웠다. 지금은 회사와 상생을 모색하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은 길이었다고 한다.
주52시간제 도입 앞두고 노동조합을 설립하다
에스티팜지회가 설립된 건 지난 2018년 5월경이다. 300인 이상 사업장이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을 앞둔 시점이었다. 에스티팜지회가 시작된 것도 주52시간제 때문이었다. 주52시간제가 도입되면 생산직군은 100만원 정도 임금저하가 예견되는 상황이었고 거기에 임금피크제까지 도입됐다. 당시 에스티팜에는 이미 기업노동조합이 존재했는데 생산직 노동자들의 입장까지 고루 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문준모 지회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실망감이 컸다. 노동조합이 뭔데 날 이렇게 힘들게 하나 싶었다"고 말했다. 조합원 간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기업노조는 분열됐다. 문준모 지회장은 노조 설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반월, 시화 두 공장을 돌며 주간이고 야간이고 노동자들을 모았다. 이때 남아있던 연차는 다 썼다. 조합원들은 이미 노동조합에 실망이 큰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는 허용되지 않았다.
신중하게 노동조합 설립 절차를 밟던 중 문제가 생겼다. 기업노조가 깨진 후 노사협의회가 노사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임금 3% 인상으로 합의할 예정이라는 공지가 떴다. 주52시간제에 따른 생산직 임금은 논의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 길로 조합원들을 안산지부로 소집해서 설립을 마쳤다. 다음날에는 회사로 공문을 보냈고 창구단일화 절차를 밟았다.
회사는 새로운 노동조합을 반기지 않았다. 특히 임금피크제를 들어내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고 한다. 연차가 높은 생산직의 경우 임금피크제로 인해 임금이 큰 폭으로 삭감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문준모 지회장은 "나이가 들었으면 고급인력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효율이 떨어진다고 임금을 깎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2-30대를 바친 회사에서 이런 취급을 받으면 너무나 허망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시간이 지나 저렇게 대우받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에스티팜 노사가 상생을 꾀하게 된 이유
시작은 항상 어렵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시도라도 해보는 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임금피크제는 사라졌고 주52시간제에 따라 기본급도 올라갔다. 현재 주52시간제는 좋은 형태로 개선중이다. 이제 에스티팜 노사는 함께 상생을 꾀하는 중이다.
문준모 지회장은 "처음 노동조합을 설립했을 때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조합이 출범하고 나서 3년간은 저희 의견을 많이 들어줬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합원 총회에서도 조합원들의 만족도가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회사는 지난 3년간 실적 부진을 겪었다. 에스티팜의 주력 상품은 C형 간염 치료제였다. 이 치료제로 매출 상승을 이뤘지만 상품을 너무 잘 만든 덕분일까. 치료제를 한 번 투여하면 재발되지 않았고 결국 장기적인 매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문준모 지회장은 "어려운 상황을 피할 수는 없으니 소통과 상생으로 풀어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교섭에서 임금 결정권을 사측에게 넘긴 이유다.
임금 결정권을 넘기자 사측은 임금저하 대신 동결로 화답했다. 또 사측은 복지도 양보했다. 조합원들의 휴가 2일이 추가됐고 장기근속 포상을 5년 단위로 확대했다. 지회장은 "자랑은 아니지만 화섬식품노조 수도권 대표자들도 에스티팜지회 복지가 괜찮다고 했다"며 소소한 자랑을 했다.
사측과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지만 선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에스티팜 대표이사는 단체협약 상견례에 꼭 참석하고 어려운 부분이 생기면 말하라고 할 정도로 협조적이다. 그러나 문준모 지회장은 경영진과 단독으로 식사도 안 한다고 한다. 각별한 사이가 되면 그만큼 노조 힘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노사 관계가 개선되니 지회도 성장하고 있다. 노동조합을 설립한 후 지금까지 탈퇴한 조합원은 단 한명도 없다. 또 처음에는 생산직 노동자들로만 구성됐었지만 생산직 외 다른 직군들도 조금씩 가입하는 추세다. 지회장은 "전 직군을 균등하게 대하려고 하고 있다"며 "노동조합이 우리(생산직)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게 계속 소통하고 공감하고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문준모 지회장은 다른 지회장들과도 정기적으로 만나 배우고 소통한다. 그의 멘토는 <월간노동법률> 2020년 9월호 '노조로 행복한 사업장'에 선정된 이해강 한국애보트지회장이다. 박영준 한국팩키지지회장과도 노조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누고 배운다고 한다.
그에게 지회장으로서 철학을 물었다. 그의 비결은 '존중'이다. 문준모 지회장은 "존중하지 않으면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며 "이건 사측과 조합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그는 "사측이 노조를 존중해주니까 모든 게 가능했다"며 "충분한 소통을 한다면 모든 부분에서 잘못되거나 안 될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출처: 월간노동법률 이지예 기자 https://www.worklaw.co.kr/view/view.asp?in_cate=104&in_cate2=1004&bi_pidx=31909]